장내리는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이자 교세를 떨쳤던 약속의 땅이었다. 이 마을에 동학대도소를 설치하여 운영하던 때, 마을 민가 외에도 400여 채의 초막이 있을 정도로 동학도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1894년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마을로 집결한 후 우금치 전투를 위해 마을을 떠난 다음 이두황이 이끄는 조선 관군이 마을로 들이닥쳐 400여 채의 초막과 민가를 불살라 마을을 초토화시킨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성의 북쪽 전망대에 오르면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최후를 맞은 통한의 전적지가 조망된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농민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벌인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북접동학농민혁명군은 집결지였던 장내리로 되돌아오지만, 철저하게 파괴된 마을에서 머물 수 없었다. 망연자실 전쟁에 패하고 근거지마저 잃은 북접농민군은 장내리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져있는 북실에서 밤을 보내게 되지만, 이들을 뒤쫓던 관군과 일본군의 새벽 기습에 모두 학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보은의 동학대도소를 중심으로 전국에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민족적 민중항쟁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전면에 내걸었던 이 혁명은 18살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에 선 것을 시작으로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희 및 상해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백범 김구선생의 생애를 통해서도 그 정신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