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후천개벽 사상과 함께 “마음속에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을 창도했던 최제우가 1864년 조정의 탄압에 의해 대구에서 처형된다. 이후, 2세 교주가 된 최시형은 동학이 여전히 탄압받는 상황이었지만, 경상도‧강원도‧전라도‧충청도를 순회‧포교활동을 하면서 교단조직을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시켰다.
당시 동학 포교의 중심지였던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있으면서 험준한 산골지역에 위치한 보은 장내리가 교단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은의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다. 보은은 위치상 각 지 역의 동학교도들을 규합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동으로는 경상도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전라도에, 서쪽으로는 공주‧홍성 등지로 갈 수 있으며, 서해안과 연결되어 있다. 북쪽으로 청주로 향하면 경기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더불어 보은 북쪽의 괴산‧충주를 지나 영월을 통하여 강원도로 갈 수 있다.
1890년대 들어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을 받는 교도들 또한 많아졌다. 따라서 동학교도들은 이러한 처지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그 방법으로 교조가 억울하게 처형되어 동학이 사교로 박해를 받고 있으니, 그 원통함을 풀어 동학에 대한 탄압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래서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게 교조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한다.
공주 삼례 집회가 실패로 끝나자 최시형과 동학교단은 포교를 공인 받기 위하여 고종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서 교도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교통이 편리하여 동학교도들이 오가기 쉬운 곳에 본부가 필요하였다. 그렇기에 1892년 12월 6일 고종에게 올릴 복합상소를 위한 도소를 보은 장내리에 두면서 동학 교단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본부를 가지게 되었다. 보은은 이로서 동학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