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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찬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몸을 불태우며 세상에 밝은 빛으로 남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다.
                        모진 세월 억압에 굴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 편에서 세상을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짧은 생이지만 바른 세상을 노래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 시인 오장환!
                        그가 떠난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불꽃같은 삶은 다시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다.
                        [자막: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시인 오장환]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부승지 벼슬까지 지낸 유교적인 사람이였던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여사의 이남으로 부친나이 59세에 낳은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 담긴 돌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였다고 전하고 있다.
                        1927년 그의 나이 10살 귀엽고 진실하고 정직한 어린 시절을 보낸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거처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하게 됐다.
                        이곳에서 박두진 시인과 함께 공부를 하였고 1930년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 4월 시적 활동에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는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고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휘문이라는 교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여기서 최초로 “아침”과 “화염”이라는 단시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6세의 어린나이이었다.
                        일제강점기가 극에 달했던 1933년 2월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그는 휴학을 하고, 그해 11월 조선 문학지에 “목욕간”이라는 산문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최두석교수:한신대학교 오장환 전집 저자]
                        오장환 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핵심어라고 할까 이거는 저로서는 진보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가 좀 더 나아질까 이걸 염두해 두고 시를 썼습니다.
                        사회가 좀 더 나아진다는 거 이걸 염두해 두지 않고서는 자기 시가 별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면서 그런 의문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면서 시를 썼던 그런 시인입니다.

                        1934년 7월부터 3년여에 걸쳐 애기꿈, 소꿉놀이, 맴맴 등 마흔한 편의 동시 발표와 그해 12월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어지에도 바다를 비롯해 3편의 동시를 발표하는 등 시인으로서 전성기에 들어선다.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16~17세의 어린 소년이었던 시인은 1935년 동경 유학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다음해인 1936년 19세 김동리, 서정주, 김달진,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집에 성벽을 비롯한 많은 시들을 발표한다.
                        또 박세영, 임화, 이찬, 윤곤강, 이용악등과 함께 “낭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장시 “수부”를 발표한다.
                        1937년 이육사 서정주, 박재륜, 김광규, 신석초, 함형수, 윤곤강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하여 “황무지”, “선부의 노래” 등을 발표하고 1939년 22세 때 제2시집 헌사를 본인이 직접 발행인으로 간행 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시인으로서 최전성기를 맡게 되고 “성벽”과 “헌사” 두권의 시집이 문단에서 대환영을 받으면서 시단에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가 오고갔다.

                        1940년 창씨개명 그해 8월10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강제 폐간! 1941년 문장과 인문 평론 강제 폐간!
                        “헌사”를 발간하고 난 이후 그는 수 많은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42년 들어서면서 2편의 시와 이듬해에는 3편의 시만을 발표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몸을 낮춘 채 어두운 시대를 견뎌 갔다.
                        고통스럽지만 정신까지 썩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단한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았으나 육신의 병이 깊어 병실에 누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46년 3월 조용히 몸을 움츠리던 그가 다시 일어났다.
                        5개월도 채 안되어 매일 일기처럼 쓴 시편들을 모아 “병든 서울”을 발표하고 해방 기념 문학상 대상 후보작에 오른다.
                        다음 해 1947년해 정부에서 발행한 국어교과서에 실린 “석탑의 노래”가 문학적 수준이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사회주의 문화예술인들에 검거 열풍과 테러가 극에 달하고 남과 북에 정치적 혼란기 상황에서 오장환 역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을 떠나버리고 북녘의 남포로 향하게 된다.
                        1950년 5월 그는 소련 정부의 배려로 모스크바 볼킨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쓴 시들을 모아 소련 기행 시집 “붉은기”를 출간한다.
                        홀로 두고 온 남쪽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고향에 대한 향수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그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메워 갔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념의 갈등은 정점으로 치닫고 그리고 1951년 어느 날 세찬 풍파 속에서 빛을 발하던 촛불은 꺼져 버린다.
                        천재시인, 시단에 왕이라고 불리웠던 그가 신장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결국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시인 도종환 : 오장환 문학제 추진위원장]
                        오장환시인은 “성벽”을 통해서 유교적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그런 시를 썼고 또 “전쟁”이라든가 “수부”라는 장시를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의 모순 또 식민지 근대도시의 모순 이런 것을 날카롭게 파헤쳤던 그런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합니다. 식민지 체제에 동화 될 수도 없고 또 강하게 저항하지도 못 했던 분열라는 자아가 도시라든가 항구를 배회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시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그러나 늘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그런 시를 많이 썼어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그리고 결국은 늘 돌아오고 싶어 하던 고향을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기간 동안에 불행하게 세상을 뜬 천재시인, 불행한 시인이 오장환 시인 입니다.

                        피고 지는 것이 꽃이라고 했던가 시인은 말한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 속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그의 노래는 34살에 끝났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시와 발자취들은 다시 꽃이 되어 피어나고 있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우리민족 모두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꽃향기로 머무르고 있다.